 |
|||
|
|
||
|
|||
유신 녀석은 이후 각종 대회에 참가해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교관님께서 녀석을 내가 출전할 소장애물(D Class)경기에 배정하셨다. 그렇게 내 생애 첫 시합은 녀석과 함께하게 된 것이다. 대회는 한 달 후에 있었다. 학교 오전 수업이 마치면 곧장 승마장으로 달려갔다. 오후에 운동하게 될 녀석을 마방에서 꺼내어 마방 복도에 묶어 놓고 녀석의 몸 구석구석을 부드럽거나 조금 거친 솔로 한 시간가량 솔질을 했다.
이미지 트레이닝
운동할 시간에 맞춰 안장을 녀석 등에 올리고 굴레를 씌워 기승 준비를 하고 평보를 하고 있으면 같이 시합에 참가하는 선배가 온다. 난 소장애물 선수이고, 선배는 중장애물 선수였기 때문에 내가 먼저 와서 준비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어린 선수들을 보면 내가 과거에 했던 생각과 같은 방법으로 선배들과 상부상조하며 운동을 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녀석과 운동을 할 조건을 모두 갖춰 평보를 하고 있으면 선배가 먼저 녀석을 운동시켰다. 난 선배가 녀석을 운동시키는 모습을 보며 내 차례에는 어떻게 운동시킬지에 대해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그리고 선배의 모든 운동이 끝나면 내가 녀석을 타고 20분가량 운동을 했고, 평보로 마무리를 했다. ‘유신’과 실제로 함께 지내는 시간은 꽤 많았다. 하지만 운동에 할애되는 시간은 아주 짧아 항상 아쉬움으로 남았었다. 그렇게 대회 전까지 꾸준히 운동을 했다. 가끔씩 선배의 장애물 훈련이 끝나면 낮은 장애물에 도전해보곤 했다.
출전 앞두고 자신감이 넘치다
첫 대회 출전을 앞두고 난 이상하리만치 자신감이 있었다. ‘유신’과 많은 시간을 함께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시험공부를 한 달간 열심히 그리고 충분히 하면 시험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듯이 나는 자신감이 있었다. 훈련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모든 면에서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유신’ 녀석의 컨디션도 아주 좋았다. 녀석의 털은 윤기가 아닌 광택이 나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막 봄이 시작되었던 때였지만 녀석의 컨디션과 외관상으로 보이는 녀석의 건강함은 다른 마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봄이면 말들은 털갈이를 시작하는데 나는 녀석을 한 달 전부터 솔로 구석구석 문질러줬고, 사료도 듬뿍듬뿍 줘서 영양 상태가 아주 좋았다. 영양 상태가 좋으니 털갈이도 다른 말에 비해서 일찍 했던 결과였다.
대회 준비에 만반을 기해 드디어 경기에 참가를 하기 위해 말을 시합이 열리는 뚝섬에 위치한 한국마사회 승마훈련원으로 이동했다. 일반적으로 대회에 참가해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대부분의 참가 단체들은 대회 2~3일 전에 대회 장소에 도착한다. 우리도 대회 3일 전에 도착을 했다. 도착 당일은 가볍게 운동을 했고, 그 다음날은 장애물 적응 훈련을 했다. 녀석의 컨디션은 역시 좋았다. 녀석이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라 아무런 까탈을 부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차분하게 시합을 기다리는 듯하기도 했다.
▲함께 첫 대회 출전을 준비하던 말 ‘유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죽음이라는 벽으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과 다시는 만나지 못한단 사실은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1981년 백마구락부 유신의 모습.
적응 훈련 중 쓰러진 ‘유신’
그러나 장애물 적응 훈련을 한창 하던 중에 장애물 한 개를 넘고 다음 장애물을 넘기 위해서 180도로 회전을 하다가 녀석이 갑자기 쓰러졌다. 가끔씩 말들은 쓰러졌다가도 다시 금방 일어나기 때문에 녀석이 다시 일어나기를 기다렸지만 녀석은 네 다리만 허공으로 버둥거릴 뿐 일어나지를 못했다. 교관님께서는 얼굴이 상기되며 갑자기 “말 몸을 마사지해라”고 고함 지르셨고 일이 심상치 않다고 느낄 겨를도 없이 온몸에 땀이 나도록 마사지를 했다. 마사지를 하며 녀석의 상태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 너무나 궁금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묻지를 못했다. 그저 아무 일이 없기를 기도를 하며 남들보다 더 힘차게 마사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간절한 염원도 운명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잠시 후 녀석은 버둥거리던 움직임을 더욱 크게 했다. 이제 일어나나보다 생각하고 더 힘차게 마사지를 했는데 그 움직임은 세상과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어린 시절 경험한 사랑하는 존재와의 이별
난 울 수가 없었다. 교관님과 선배 형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셨지만 난 유신이 세상과 이별을 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난 계속 마사지를 했고, 시합에 참가한 다른 선수들에 의해 둘러싸이게 됐다. 마사지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한 선배 형이 내 어깨를 보듬어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교관님께서는 입고 있던 점퍼를 녀석의 다 감지 못한 눈 위에 살포시 덮어줬다. 나는 그제야 녀석의 죽음을 인식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장애 아닌 장애를 갖고 태어나서 우여곡절 끝에 이제야 사랑받게 되는데, 녀석은 잘나빠진 사랑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세상의 끈을 놓았다. 이렇게 녀석과의 만남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녀석과 함께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모습들은 내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내게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죽음이라는 벽으로 인해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이별은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충격이 더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녀석에게서 사랑하는 마음을 배웠다. 아마도 녀석은 내게 사랑을 가르치려고 이 세상에 왔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탄`을 타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백형진 회장님께서 타시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어린 마음에 회장님이 타는 말이 가장 좋은 말일 것이라 생각했다. 1982년 전재식 감독의 모습(왼쪽).
타보고 싶은 동경의 말 ‘탄’
경기도 승마협회의 승마장 이름은 백마구락부다. 당시만 해도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명칭들이 많이 사용되던 때였다. 백마구락부에는 여러 두의 마필이 있었지만 그중에 ‘탄’이라는 말은 내가 초보였을 때 가장 타보고 싶었던 동경의 말이었다. 일단 말의 크기가 크고 Chestnut의 모색이 아주 예쁜 말이었다. 속보 반동이 많이 크지만 구보의 움직임은 크고 웅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타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백형진 회장님께서 타시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어린 마음에 회장님께서 타시는 말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말일 것이라 생각했다. 회장님께서는 오로지 ‘탄’만을 즐겨 타셨고 흰색 옷을 즐겨 입으신 회장님의 승마 하시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멋있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했다. 녀석을 기승한 회장님은 당시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회장님의 모든 지원으로 운동을 하는 난 승마장에서 궂은일도 도와주고 여러 가지 힘든 일도 내 일처럼 도우며 운동을 했다. 하루는 보조 마장에서 돌을 주워내고 있을 때였다. 어떤 꼬마가 ‘탄’을 타고 돌을 주워내고 있는 보조 마장으로 와서 규칙도 없이 속보와 구보를 하며 마구 뛰어다녔다. 난 돌을 열심히 주워내고 있다가 부러움 반 시기심 반으로 녀석을 타고 있는 그 아이를 넋 놓고 바라봤다. “저 새끼 누구냐?”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이를 도화선으로 “싸가지가 없네” “말이 불쌍하다”는 등 부러움이 넘친 격한 말들이 나왔다. 그 아이는 지금 KRA교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절친한 후배이고 승마협회 회장님의 조카였다. 회장님의 조카이니 해코지도 할 수 없고 그저 우리끼리 뒷담화나 할 정도였다. 지금도 가끔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꽃을 피우기도 한다.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