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무궁화배와 문광부 장관배 경마대회를 각각 61Kg과 63Kg의 무거운 등짐을 짊어지고서도 연거푸 석권하며, 한국경마사에 큰 획을 남겼던 ‘고대산’. 그 해 그랑프리에 출전, 64Kg의 한계부담중량에 무너지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후 1997년 7월까지 1군 부진마로서 약 4년간 36전 1승 2위 4회의 초라한 모습으로 옛날의 영광이 무색할 만큼 팬들의 철저한 외면속에서 경주로를 떠난 불운의 명마로 기억되고 있다. 90년 중반에 경마에 입문한 중견 팬들조차, 고대산을 상습적 부진마 인 줄 알았다고 하니,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경마대회 통산 15관왕에 빛나는 영예기수 안병기의 경마대회 승운도 바로 이 ‘고대산’에서 시작되어, ‘풀그림’‘청파’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한 고대산의 전성기로 기록되던 93년 무궁화배 경마대회를 되짚어보며, 그 찬란했던 영광과 함께했던 고대산의 진면목을 반추해보자.

신구세력간의 불꽃튀는 한판승부  
당시 특별상금 5백만원, 순위본상 3백만원으로 우승마에게 총 8백7만6천원의 상금과 우승트로피가 주어진 93년 무궁화배 경마대회는 1993년 5월 23일 제10경주 2,200m 레이스로 화려하게 펼쳐졌다. 정상급 마필 12두가 출사표를 던졌는데, 그 무렵 관록에서 과천벌 최강임을 자부하던 ‘호동왕자’, ‘보은’, ‘고대산’, ‘춘풍’과  데뷔 후 6연승의 파죽지세로 ‘가속도’의 아성에 도전하던  신예명마 ‘비라리’, 그리고 C6 등급 뚝섬배 경마대회에서 우승한 기세로 도전장을 내민 박태종 기수의 애마 ‘케뷔’와 ‘대성리’,‘임무완수’등이 상반기 최고의 경마대회인 무궁화배 대상경주에서 관록마의 수성이냐, 신진강호의 세대교체냐를 놓고 한판승부를 벌였다.

61Kg ‘고대산’의 승부수는 역시 선행
당시 1등급 레이스에서만 여섯 번 우승하며 계속 부담중량을 높여가던 ‘고대산’이 2200m의 장거리 레이스임에도 선택한 승부수는 무엇이었을까? 탕!소리와 함께 발주게이트를 나와서 제일 먼저 선두자리를 점한 것은 역시 선행형의 ‘고대산’이었다. 초반부터 3코너 중반까지 선두 ‘고대산’의 뒤를 이은 것은 경주전의 예상대로 5번 ‘호동왕자’, 3번 ‘케뷔’, 2번 ‘비라리’의 순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상. 그러한 형세에서 조그만 변화가 감지된 것은 3코너와 4코너 사이였다. 2위를 유지하던 ‘호동왕자’가 외곽코스를 돌며 선두 ‘고대산’을 위협하며 앞으로 나선 것이다. 그러나 다시 4코너를 벗어나면서 ‘고대산’이 비축해뒀던 힘을 내며 선두로 내달았고, ‘호동왕자’는 힘을 소모한 듯 간신히 2위권 유지에 급급하고 있었다.

‘춘풍’의 막판 질풍같은 추입력
결승주로에서 상황은 ‘고대산’의 우승을 위한 무대처럼 보였다. 61Kg의 단독선행에도 ‘고대산’의 폭발적인 선행력은 식을 줄 몰랐다. 그러나 결승선 전방 100m 지점에서 ‘고대산’을 바짝 추격하며 눈에 띄는 추입력으로 거리를  좁히고 있던 말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12번 ‘춘풍’이었다. 55Kg의 ‘춘풍’이 내뿜는 추입력은 61Kg의 단독선행으로 발걸음이 무뎌진 ‘고대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감이었다. 막판 뒤집기에 대한 기대로 관중석은 술렁거렸고, 모든 이들의 시선은 결승선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춘풍’의 역습이 실현되기엔 결승선이 너무 가까웠다. 안병기 기수는 ‘춘풍’에 기승한 김성현 기수의 모습이 눈에 띈 듯 사력을 다해 몰아부쳤고, 결국 목차이의 아슬아슬한 승부를 연출하며 상반기 최고의 영예 무궁화배 경마대회의 트로피를 거머쥔 것이다.

우승마 ‘고대산’
우승기록 2분 27초. 단승식 배당률 2.1배에서 말해주듯, 61Kg의 부담중량에도 ‘고대산’의 능력이 얼마나 월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93년 2월 7일 이후, 1등급 경주에서 연속 우승하며 +2Kg, +3Kg, +4Kg의 중량을 계속 극복했고, 이날 경주에서도 출전마 중 최고의 부담중량으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몇달 후 문광부 장관배에서 63Kg의 엄청난 부담중량을 극복하며 절정의 기량을 뽐내게 되지만, 이런 무리한 도전과 극복이 경주마로서의 장래에 참담한 곤욕을 치루게 될 줄 그 당시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결국 그 해 그랑프리에 출전, 64Kg의 벽에 무너지며 찬란한 영광을 끝낸 ‘고대산’은 그 후 고부담 중량의 후유증으로 97년 7월까지 1군 부진마로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팬들의 혹독한 냉대 속에서 경주로를 떠나게 된 것이다.

‘고대산’의 안병기 기수와 고옥봉 조교사
1984년 10월에 데뷔한 안병기 기수는 지금 경마대회 15관왕의 영예가 무색할 만큼, 그 당시엔 10년 가까이 경마대회 우승이 없었다. ‘고대산’으로 무궁화배를 차지하기 전, 바로 5월 9일에 스포츠조선배에서 ‘사투봉’에 기승하여 우승한 것이 처음이었다. 연이은 ‘고대산’의  무궁화배 우승으로 그 해 1993년이 생애 최고의 5월로 기억된 것이다. 지금은 ‘스트라이크테러’의 조교사로 유명한 10조 김정진 조교사가 당시 조교보로서 ‘고대산’의 훈련을 맡았고, 고옥봉 조교사 역시 안병기 기수와 마찬가지로 ‘사투봉’과 ‘고대산’으로 잊을 수 없는 첫 경마대회 우승을 그 해 5월 달에 연거푸 기록한 것이다.

【손성호 기자 ssho@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