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명승부-제7회 한국마사회장배 경마대회-회색빛 저격수 ‘보은’

출전마들의 화려했던 위용-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기엔 아직 이른 10월 말. 영하로 떨어진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국경마 사상 독보적인 선행형 마필들로 기억되는 가속도, 경지, 영웅호걸을 비롯한 최고의 준족 12두가 제7회 한국마사회장배의 패권을 놓고 1991년 10월 20일에 자웅을 겨뤘다. 현재 경마경력이 10여 년쯤 되는 올드팬이라면, 그 날의 박진감 있었던 선행마들 사이의 초반 혈투를 기억할 것이고, 다른 수많은 경마 팬들은 현재의 자당, 신세대, 샤이닝타임 등의 당대의 선행마와 비교하면서, 그 당시 선행마들의 능력에 대해 무척 궁금해 할 것이다. 데뷔 후 11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며 한번도 선행에 실패하지 않은 무적의 암말 ‘가속도’와 500Kg의 당당한 체구로 초반 몸싸움에서 결코 밀리지 않았던 ‘경지’, 그리고 한번 선행을 뺏겨도 뚝심으로 다시 선두권을 뺏고야 마는 강단마 ‘영웅호걸’의 치열한 접전이 예상됐기에, 그 어떤 경마대회 보다 열기가 뜨거웠다. 여기에 현재는 조교사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김명국 기수가 기승한 ‘보은’(당시 10전 5승 2위 3회), 지금은 2200m의 황제라는 닉네임으로 팬들의 뇌리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징검다리’와 ‘곰돌이’, ‘ 만세호’, ‘ 단군신화’ 등 그 당시 내노라하는 정상권 마필들이 총출동한 경마대회였다. 11연승의 승률 100%를 이어가던 가속도의 연승행진이 최대고비를 맞은 경주임에 틀림없었다. 1번 게이트를 배정받은 경쟁 선행마 ‘경지’는 13전 9승 2위 2회의 전적에서 말해주듯 우승 후보마로서 손색이 없었다. 반면 9B번을 달고 출전한 ‘가속도’는 출발점이 상대적으로 불리했고, 59Kg의 부담중량은 연승행진에 걸림돌이 되리라 예측됐다.

동반몰락 자초한 치열한 선행다툼-
출발과 동시에 선행마들은 게이트번호에 관계없이 선두를 확보, 질주했다. 2코너를 돌고 3코너에 이르기까지 1번 경지가 가속도를 의식하며 도주한 결과, 좋은기록으로 각 구간을 주파했다. 그 뒤를 가속도와 영웅호걸이 접전을 펼쳤고, 조금 간격을 두고 김명국 기수의 보은이 중위권을 형성했다. 4코너까지 주로 안쪽에 붙어서 꾸준히 선두를 추격하던 6번 보은이 선두그룹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헤치며 나가자, 2위권 그룹에서는 일대혼전이 벌어지게 됐다. 선행마들간의 서로를 의식한 무리한 선행싸움이 결국 동반몰락을 자초했으며, 이때 인코스만을 질주하며 힘을 비축해뒀던 보은은 직선 주로 진입과 동시에 선행마들의 무뎌진 발걸음을 속속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기대를 모았던 가속도 경지 등 초반 선행마들이 추입마에게 역공을 당하는 순간이었다. 보은은 2위마 영웅호걸을 7마신 차이로 이기며 우승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관람대에서 경주를 구경하던 경마 팬들은 선행마들의 초반 박진감 넘치는 혈투에 이어 추입의 진수까지 맛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32,740명의 그 당시로선 최고의 입장 인원이 말해주듯, 이 경주의 흥행성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데뷔 후 11연승 기록으로 멈춘 ‘가속도’-
당시 ‘포경선’의 15연승 신화를 갈아치울 기세로 출사표를 던졌던 ‘가속도’의 연승행진은 이 날 패배로 그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새강자’의 15연승 기록과 ‘자당’의 11연승 기록으로 희소가치가 떨어지긴 했지만, 90년대 초반의 쟁쟁한 외국산마 판도에서 ‘가속도’가 쌓아올린 연승행진과 데뷔 후 11연승의 대기록은 아직도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이날 경마 팬들은 가속도에 기승한 감창옥 기수가 펼칠 레이스 전개에 대해 경주 전부터 의견이 분분했다. 출발지가 유리한 발빠른 경지를 앞세운 역습작전이냐? 아니면 초반 무리를 해서라도 기선 제압작전으로 나가느냐? 결국 김창옥 기수는 같은 선행형 경지를 잡기위해 필사의 스타트를 하는 위험수를 두고 말았다. 인코스의 ‘경지’와 ‘영웅호걸’은 ‘가속도’에게 인코스를 내주어서는 승산이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치열한 자리싸움을 벌인 끝에 4코너 돌아서 직선 주로에 진입할 즈음엔 모두 다 체력이 바닥나 버렸으며, 선행마들을 10 여 미터 앞에 두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김명국 기수의 ‘보은’에게 우승트로피를 넘겨준 것이다.

우승마 ‘보은’과 김명국 기수-
당시 뉴질랜드산 3세 수말인 ‘보은’은 항상 500Kg에 닿을 듯 말 듯한 안정적인 몸무게를 유지하며 힘이 좋은 회색마로서 인기가 높았다. 보은의 김명국 기수는 명실공히 그 당시 국내 최고의 승부사라는 호칭에 걸맞을 만큼, 선행마들의 체력싸움을 역이용한 지능적인 레이스 전개로 값진 대상경주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그 날 마사회장배 패권을 차지한 후 명마로 도약한 보은이 남긴 족적은 한국경마에서 뚜렷이 기억되고있다. 비록 59Kg 이상의 부담중량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옥의 티로 남으나, 이듬해 1992년 5월의 상반기 최고의 영예 무궁화배를 제패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다시 2년 후 1994년의 무궁화배마저 우승함으로서 그랑프리에 버금가는 상반기 최고의 경마대회 2관왕이라는 화려한 수식을 얻은 보은은 결승주로에서 힘이 떨어진 선행마들을 낚아채는‘회색빛 저격수’로 경마팬의 가슴에 살아있다.

【손성호 기자 ssho@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