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Kg 호주산 거세마의 신화
1990년과 1991년, 2년 연속 그랑프리 제패의 신기원을 이룩한 ‘가속도’의 은퇴여부가 과천벌에 핫이슈로 부상할 즈음, 벌써부터 가속도의 공백을 메워줄 새로운 기대주가 데뷔전을 치루고 있었다. 1992년 4월말 봄기운이 완연했던 늦봄이다. 80년대 중반 ‘포경선’에서 시작되어 ‘강타자’, ‘가속도’, ‘경지’, ‘고대산’, ‘보은’, ‘징검다리’로 이어진 뉴질랜드산 계보 명마들이 득세하던 과천벌의 판도에서, 500Kg 호주산 거세마의 신화가 그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포경선’의 숙적으로 호주산 거세마의 원조격인 ‘진격’ 이후, 실로 5년만에 호주산 제왕이 출현한 것이다. 강한 스타트와 빠른 속도감으로 데뷔 후 8전 8승의 파죽지세를 보이며 ‘가속도’가 떠난 무주공산의 1등급 대권을 꿈꾸던 그 마필은 바로 ‘호동왕자’다. 급기야 1992년 그랑프리 경주에서 무려 단식배당률 1.3배, 연식배당률 1.0배의 절대 인기마로 떠오른다. 90, 91그랑프리 우승마였던 ‘가속도’의 은퇴가 경마팬들에게 아쉬움으로 다가오기엔 너무도 빠른 신예강호의 출현이었다. 그러나 53Kg ‘춘풍’의 막판 역주에 코차로 덜미를 잡힌 ‘호동왕자’는 정상등극의 문턱에서 분루를 삼키고 만다. 그 후 1993년에 관록의 경마대회인 무궁화배와 장관배, 그리고 다시금 그랑프리에 출사표를 던지지만, 항상 우승마 후보로만 지목됐을 뿐, 시상식에서의 영광은 철저하게 호동왕자를 외면했다. 1994년부터는 일반경주와 특별경주에만 주력, 개인마주제 이후 맞이한 새로운 주인에게 두둑한 상금벌이를 선사하지만, 끝내 정상도전에 미련을 못버린 듯 다시 1994년 그랑프리 경주에 출전했다. 그때 ‘호동왕자’의 마령은 6세를 넘기려 했고, 경주마로서 황혼기에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마명처럼 항상 왕자로서 정상도전에만 나섰을 뿐, 한번도 과천벌을 호령하지 못했던 ‘호동왕자’는 결국 94 그랑프리 경주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후 그 모습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된다. 언제나 절대강자로 군림했지만, 한번도 정상의 영광에 닫지 못했던 ‘영원한 왕자’. 바로 그 ‘호동왕자’가 차지했던 유일한 영예, 92 JRA트로피 경마대회를 소개한다.
7전7승의 신예마 "호동왕자"
7전7승의 500Kg 호주산 거세마로서 첫 경마대회 도전장을 던진 ‘호동왕자’에게, 그 당시 경마팬들은 단승식 1.1배, 연승식 1.1배의 쌍둥이 배당으로 화답했다. 그래도 명색이 경마대회인데, 이러한 초저배당이 형성된 이유는 상대마와 대회의 수준이 떨어졌다기 보다는 ‘호동왕자’의 능력이 너무나 월등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JRA 경마대회의 연혁을 살펴보면, 기수초청 없는 컵 교환경주로 호주 페케남컵 경주와 비슷했지만, 일본 최대 규모의 중앙경마회(JRA)와 처음있는 교류경주여서, 본격적인 해외교류 경마의 물꼬를 튼다는 점에서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치뤄진 경주였다. 이러한 일본 중앙경마회와의 첫 교류로 시행된 1992년 JRA트로피 경마대회는 2000m 레이스로 총상금 1천3백8십만원을 놓고 관록마와 신예마 12두가 경쟁을 펼쳤다. 입장인원은 2만8천여 관중으로 지하철 4호선이 개통 안 된, 초기 과천경마장의 입지로 보면 상당한 규모였다.
거침없는 질주
출전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절대 축마로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호동왕자’의 적수로 그나마 도전세를 형성하던 마필은 김점오 조교사 마방의 ‘동틀무렵’과 1988년 조교사로 데뷔한 박원덕 조교사에게 첫 경마대회 우승의 영광을 안겨주리라 기대됐던 ‘무패왕’이었다. 그 외에 단군신화, 남대천, 백송 등이 2~3위권 후보로 분류됐다. 경주전개를 설명하자면, 한마디로 출발부터 골인까지 순위변동이 전혀 없는 상태로, 다만 호동왕자가 같이 출전한 추입마들을 4코너 이후 어느정도 따돌릴 수 있느냐에 경주의 촛점이 모아졌다. 이윽고 발주기가 열린 후, 12두가 동시에 출발했다. 출발과 동시에 육중한 체구의 회색마가 선두로 뛰쳐나왔고, 3~4코너를 돌아 직선주로에 접어들 때 까지, 시종일관 선두를 유지했다. 바로 이 4번 호동왕자 뒤로 1번 무패왕, 8B번 단군신화가 치열한 2위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결승주로에 접어들었고, 팬들은 추입마가 어느정도 호동왕자와의 간격을 좁힐 수 있을까에 이목을 집중했으나, 예상외로 50m 이상의 대차를 보이며 결승선을 통과하고 말았다. 2분 11초 6의 보기 드문 호기록이었다. 그 뒤를 이어, 혼전 중 투지가 좋았던 1번 무패왕이 2위로 골인하며 6.5배의 복승식 배당을 선사했다.
장세한 기수와 박진호 조교사
1991년 4월부터 현재까지 무려 10년이 넘는 오랜 시간동안 한솥밥을 먹은 박진호 조교사와 장세한 기수는 이날 우승으로 감격스런 첫 경마대회 우승트로피를 안게 됐다. 87년에 기수로 데뷔, 이렇다 할 성적없이 부진에 시달렸던 장세한 기수는 5년만에 처음으로 경마대회 우승의 영광을 누렸고, 호동왕자는 그의 기수 인생에서 잊을수 없는 애마로 남게됐다. 이날 경주에서 담담한 마음으로 호동왕자의 질주를 끝까지 지켜봤던 박진호 조교사는 우승은 이미 확신했던듯, 경주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2000m 신기록을 깨지 못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 우승의 기쁨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영원한 왕자로 남은 ‘호동왕자’
이날 JRA트로피 우승 이후, 다시는 경마대회 시상식에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던 ‘호동왕자’. 하지만 한국경마사의 명마계보를 논할 때마다, ‘호동왕자’의 마명이 거명되는 연유는 무엇일까? 92 그랑프리에서 단식 1.3배의 최저배당으로 팔리는 등, 과천벌 최정상의 능력임을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경마대회 출전시마다 영원한 우승후보로 지목되던 최강마였다. 1994년 세번째의 그랑프리 도전에서 출전마 14두 중 13위의 수모를 당한 ‘호동왕자’는 우전구절염의 악화로 다시는 경주로에서 볼 수 없게 된다. 대견, 지구력, 신세대로 이어진 90년대 호주산 거세마 계보의 시조 ‘호동왕자’. 과천벌 제왕으로 등극하기 위해 끊임없는 도전에 나섰으나, 마명처럼 언제나 왕자로서의 위치에만 머물렀던 ‘호동왕자’의 아쉬움을 달래본다.
작 성 자 : 손성호 ssho@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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