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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배에서 ‘기모아’의 모습은 불꽃 추입 그 자체였다. 중계용 카메라도 미처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우리 눈앞에서 “휙” 지나쳤던 걸 기억하는가!
처음 타는 이성일 기수에게 “윤승하면서는 실망할 거고, 경주 중엔 아쉬울 거고, 경주 후엔 다시 타고싶어 질 것”이라고 했다던 김점오 조교사.
400kg짜리 왜소한 말이 보여준 불꽃 추입의 진수, 그게 바로 김점오의 힘이다.
【이희경 기자 eheek@krj.co.kr】
커다란 소나무처럼…!
큰솔은 말 그대로 크다란 소나무다. 4년 전쯤 그가 관리했던 국산마의 마명이며, 지금은 넷(net) 상에서 팬들과 만나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한국마사회 홈페이지 조교사광장엘 가면 항상 김점오 조교사를 찾는 팬과 그들의 부름에 일일이 답하는 큰솔을 볼 수 있다.
특별관리의 채식상태, 훈련상태가 어떤가요…
○○○ 기수를 태우면 안 되나요…
고려방이 왜 출전하지 않나요…
궁금한 게 많은 만큼 시도때도 없이 그를 향한 질문이 쏟아져 나온다.
“장애가 많으면 감춰지는 것도 많아지는 겁니다. 뭐가 그리 비밀이라고 이 곳 얘기를 감춰두고 여기 사람(기수, 조교사 등 마필관계자)들을 가둬둬야 합니까. 그럼 팬들은 뭘 믿고 베팅을 할 수 있겠냐구요”
새벽 훈련을 마치고 잠시 쉴 틈도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답변을 하고있는 김점오 조교사, 팬들과의 대화 시간이 즐거워 보인다.
“인터넷 보급률이 세계 1위라면서요. 또 성능 좋은 휴대폰은 얼마나 넘쳐나고 있는 세상입니까. 주변 환경이 그런데 기수들을, 조교사들을 경마날이라고 이곳에 가둬둔다고 공정경마가 구현되고 부정이 사라진답니까. 자꾸 꺼내놔야 해요. 잘한 건 칭찬 받고 못한 건 욕도 먹고 그래야 자연스러운 거죠”
그럼에도 간혹 원색적 비난이 날아올 땐 그도 당혹스럽다. 사람이다 보니 화도 난다.
“좋다고 너무 좋아할 필요도 없고, 상황 나쁘다고 무조건 찡그리고 있을 필욘 없죠.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나는 조교사로, 고객은 팬으로 그렇게 만나면 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그 정도 만큼만”
명 기수 출신의 다혈질 조교사
김점오 조교사는 기수출신이다. 79년 데뷔해 만 8년 간 정상급 기수로 활약했다. 그때의 경험이 조교사가 된 지금 그에겐 명약이다.
“기수들과의 소통이 가능해요. 예를 들어 선행작전을 지시했는데 뜻대로 경주 운영이 되지 않았을 때, 충분히 주변 상황을 통해 이해를 하기도 하고 조언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차선책을 미리 준비할 수도 있는 거죠”
그는 게으른 기수를 싫어한다. 실력이 조금 낫다고 해서 훈련에 불참한다거나, 말을 가려 탄다거나 하는 것은 프로로서 정당하지 못한 행동이라 생각한다.
대신 실력은 좀 모자라더라도 부지런히 노력하는 기수에겐 기회를 주고싶다. 후보생이던 이신영을 발탁했던 것도 저녁 무렵이면 몇 바퀴고 혼자 트랙을 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스타 기수는 혼자 말 잘 탄다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주변에서 이끌어주고 뒷받침해주는 조력자가 다 있는 거죠. 여긴 프로들이 모여있는 집단이에요. 날고 긴다는 프로 세계에선 각고의 노력만이 유일한 살길이죠”
평생의 오점 “우승예감”, 다시 안 올 인연 “고려방”
원년 코리안더비 우승마 ‘우승예감’을 기억하는지…?
김점오 조교사에겐 기쁨과 절망을 동시에 안긴 말이다. 코리안더비 패권의 기쁨도 잠시, 방목 중에 골절상을 당해 안락사 시켰던 기억은 아직도 악몽처럼 생생하다.
“잘 땐 와이프가 옆에서 아프다고 끙끙대도 몰라요. 근데 말이 아프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죠. 밤새 옆을 지키며 병 든 아이 돌보듯, 그렇게 키웠던 말이 우승예감입니다. 잘 해 보려고… 마방에 가둬두기보다 초지에 방목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아 풀어두었던 건데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땐 말이고, 경주고 다 귀찮았습니다. 내가 왜 이 걸 하고 있나… 싶었죠”
그리고 그의 앞에 다시 ‘고려방’이 나타났다. 세 살 때부터 고질적인 구절염에 시달리고 있다는 고려방은 남들 두 번 뛸 때 한번씩 모습을 드러내 당당한 위용을 한껏 뽐낸다.
지난 여름엔 국산마 최고 타이틀이 걸린 한국마사회장배를 버리고 특별경주급인 농협중앙회배에 나타나 주위를 의아하게 만들었는데…
“경주마에게도 기(氣)가 중요해요. 한 번 지면 곧 그에 익숙해지죠. 지지 않도록, 기와 자존심을 살려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결과적으로 그 때 농협배에서 이겼기 때문에 아직 고려방이 최고의 위치에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거라고 믿습니다. 대신 마주(님) 설득하느라 그 때 애 좀 먹었어요(웃음)”
얼마전 한 인터넷 게시판에서 ‘경주마도 자신이 우승하는 걸 알까?’하는 질문을 본 적이 있다.
“당연하죠. 사람처럼 감정이 있는 동물인데, 자신의 대접이 달라진다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 목욕 시켜주는 손길이 부드러운지 투박한지, 훈련자의 태도에 애정이 있는지 건성인지, 다 압니다”
팬들이 조교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물었다.
“다른 게 뭐 있습니까? 정직한 승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내가 대신 마권을 구매해 줄 수도 없는 거고, 남몰래 정보를 빼내줄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관리하는 말로 능력껏 최선의 승부를 펼쳐 보이면 그 걸로 내 역할은 다 하는 겁니다. 난 그렇게 할 거구요”
시원한 대답만큼 통쾌한 승부, 기대해도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