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마의 귀소본능
적장의 검에 베여 중상을 입은 주인을 등에 싣고 사흘밤낮을 내달려 주인의 생명을 구했다는 옛날 적토마의 고사나, 경주도중 기수의 낙마로 혼자 결승선에 뛰어 들어오는 경주마나, 모두 다 말이라는 동물이 지닌 귀소본능의 발현이다. 일부러 험한 산길을 골라 40Km나 떨어진 외딴곳에 갖다 놓아도 말은 본능적으로 집을 찾아간다는 실험결과도 있다. 영리함으로 신망이 높은 진돗개조차도 경주마의 지능에는 비교할 바 못된다. 경주마와 생활을 함께 하는 마방의 조교사나 관리사의 경험담에 의하면, 말은 자기를 돌봐주는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기본이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했던 사람은 결코 잊지 않아서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를 한다고 한다. 한번 배운 것은 쉽게 잊지 않아서, 인간의 지능에 비교하자면 3∼4세 어린이의 지능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래서 경주마를 순치, 훈련시킬 때는 마방의 관계자들은 마치 사람을 대하듯이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수가 낙마해도 혼자서 달리는 경주마
경주에 출전한 말은 기수가 낙마해도 혼자 달린다. 말은 군집성을 가진 동물이기에 주위의 다른 말들이 전력질주하면, 자신도 불안을 느껴 무의식적으로 무리 속에 끼여서 같이 달리는 선천적인 본능도 있지만, 새벽훈련 과정을 보면 4코너 돌아서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는 절대로 경주마를 멈추게 하지 않는 것이 엄격한 규칙처럼 지켜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주마는 이러한 훈련의 반복으로 경주에 나서면 무조건 한바퀴 돌아서 결승선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경주마를 훈련시킨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도록 근육과 심폐기능을 강화시키는 측면이고, 둘째는 지능과 기억력을 좋게 해 경마의 규칙에 알맞도록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경주 중에 돌발적인 사고로 기수가 낙마해도 결승선까지 질주하는 경주마는 반복적인 주행습성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인기1위마 ‘케뷔’의 나홀로 질주가 부른 폭풍
1993년 9월 26일 제12경주에서 기수 없이 오로지 훈련으로 습득된 경주감각만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경주마가 있었다. 현재 과천벌 최고의 승부사로 불리는 박태종 기수의 ‘케뷔’였다. 1991년 4월부터 현재까지 10년을 동고동락한 38조 박흥진 마방의 최고의 명마로 불리는 ‘케뷔’에 기승한 박태종 기수는 발주기가 열리자마자 낙마했고, ‘케뷔’는 혼자 전력질주해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출전마 14두 중 단승식 1.6배의 최고 인기마였던 ‘케뷔’는 당연히 실격처리 됐고, ‘케뷔’에 베팅했던 수많은 경마팬 가운데 일부가 경주자체의 무효를 주장하며 환불을 요구, 유리창을 부수는 일대소란을 벌였다. 마사회 기물을 파괴하고 불까지 지르는 과열폭동에서 경찰의 출동으로 3시간만에 진압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기수의 고의적 낙마라는 터무니없는 논리가 폭동의 시발점이 됐으나, 기수 없이 오직 훈련으로 습득된 감각만으로 결승선을 1위로 통과한 ‘케뷔’의 영리함이 결국 극한 상황으로 치닫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손성호 기자 ssho@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