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무가 서울호텔의 커피？熾？들어섰을 때 한곳에 앉아 손을 흔들어보이던 여자는 예전의 이혜진의 모습이 아니었다. 손영무는 마치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 앞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머뭇거렸다.
"뭐해? 앉지 않고?"
목소리도 지난주 경마장에서 한숨과 함께 뱉어내던 지친 듯한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생기발랄한 목소리였다.
"응? 응..."
손영무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 앞에 앉았다. 언제 머리손질을 했는지 스트레이트로 뻗어 내린 머리카락이 사뿐히 어깨 위에 걸쳐있었다. 화장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에서 예전에 그녀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던 날 느꼈던 순백함을 느꼈다.
"학교 다닐 때 생각이 나서 스트레이트파마를 좀 해봤어. 괜찮아?"
"응. 좋은데?"
손영무는 어색해하면서도 진심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웨이터가 다가와서 물 잔을 내려놓고 주문을 기다렸다.
"난 커피... 뭐 마실 거야?"
"커피하지 뭐..."
손영무가 웨이터에게 동의라도 구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웨이터는 고개를 꾸벅하고 돌아서갔다.
"지난번 만났을 때 물어봤어야 했는데 내 얘기만 하다가 못 물어봤네. 만나는 여자 있어?" 
손영무는 그녀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막 물 잔을 들려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 이혜진은 그런 손영무를 빤히 바라보며 흘낏 웃었다.
"아직도 없는 모양이네?"
손영무는 대답대신 눈을 껌벅였다. 그녀가 다시 웃었다.
"눈 껌벅이는 거 보니까 내 짐작이 맞는가보네?"
짐작이라니? 손영무는 마음속으로 반문을 하면서 다시 눈을 껌벅였다.
"그럼...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손영무의 뻥한 표정은 아랑곳도 않고 이혜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시작한다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네가 일방적인 선언을 하고 나면 저절로 다시 시작되는 건가?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건가? 손영무는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반문을 하면서도
"그럼, 먼저 날 구해 줘."
하고 이혜진이 마치 실제로 선언이라도 하는 듯한 투로 내던지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낯을 붉히고만 있다가
"구제를 해달라니?"
하며 뻥한 표정으로 겨우 되물었다. 이혜진은 몸을 돌려 옆자리에 놓아둔 핸드백을 열더니 수표 두 장을 꺼내 손영무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거면 해볼 수 있겠어?"
손영무는 이혜진이 내미는 수표를 내려다보았다. 백만 원 권 두 장이었다.
"내가 빌려낼 수 있는 마지막 돈이야."
이혜진이 재촉이라도 하듯 말을 이어갔다.
"절대로 잃어서는 안 돼. 이 돈은 오늘 당장 갚아야 하거든? 물론 높은 이자도 붙여줘야 하구."
이혜진은 마치 취조를 한 후 대답을 기다리는 심문관의 표정처럼 손영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손영무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하고 비로소 반문을 했다. 이혜진은 마치 손영무가 습관처럼 눈을 껌벅이던 것처럼 잠시 눈을 깜빡여 보이더니
"날 좋아했잖아?"
했다. 손영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당당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손영무는 잠시 눈을 껌벅이다가
"이거 잃으면?"
하고 물었다.
"잃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손영무는 한참동안을 수표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도 그런 손영무를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사이 웨이터가 와서 커피 잔을 내려놓고 갔는데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런 자세로 있었다. 이윽고 손영무가 고개를 들고 이혜진을 보았다. 이혜진은 더욱 당당한 표정으로 손영무를 바라보았다.
"얼마가 필요한 거야?"
"뭐가?"
"얼마면 내가 혜진이를 구제 해주게 되는 거야?
이혜진의 표정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