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귀족은 의무를 진다’는 의미의 프랑스어다. 부와 권력은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한다는 의미이며, 주로 사회 지도층이나 상류층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 하나이다. 경마에서는 사회적·도덕적으로 엄격하게 높은 품격을 요구하는 마주(馬主)가 대표적인 경우다.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의 마주들도 지난 2007년 부산경남마주장학회를 설립하고 현재까지 활발하게 장학 사업을 펼치고 있다. 많은 마주가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내고, 사회공헌을 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미스터파크’의 마주로 더 잘 알려진 곽종수 마주가 눈에 띈다. 지난달 24일 인터뷰를 위해 서울 서초구에 있는 곽종수 마주의 사무실을 찾았다. 실내에 들어서자 갖은 표창장과 감사패가 가득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국세청으로부터 받은 감사장이었다. 그만큼 기업가로서도 성실납세의 의무를 다한 것 같았다. 몸소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하는 곽종수 마주를 만나 이야기 나눴다.

-곽종수 마주는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의 명마 ‘미스터파크’의 마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어떤 계기로 마주의 길에 접어들었나.
난 2004년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이 오픈될 때부터 활동한 창단 마주다. 당시 친분이 있던 트리플크라운 목장의 오상철 씨로부터 두 마리의 말을 받게 됐다. 그러면서 마주의 길에 접어들게 됐다. 당시 받았던 말 중 한 마리가 바로 ‘미스터파크’였다. ‘미스터파크’가 크게 활약한 덕분에 많은 말도 사고, 돈도 많이 썼다.

-어디에 그렇게 돈을 많이 썼나
‘미스터파크’가 각종 대회에 나가서 우승도 많이 했다. 23경기에 나가서 21승을 기록했으니 대단했다. 당시 연간 소득이 한 8억 원에서 9억 원가량 됐다. 종합소득세로만 2억 이상 지출했던 것 같다. 의료보험비도 540만 원가량 낸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는 말도 많이 샀다. 말 경매장에 가면 내가 최고가를 부르곤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판도 많이 받았다.

-당시 ‘미스터파크’의 안락사를 반대했다던데.
내게 기쁨을 준 자식과 같은 말인데 어떻게 안락사를 시키고 싶겠나. 안락사 안 시키고 치료한 후에 녀석이 태어난 목장에서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정했는데 현실적으로 치료가 힘들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안락사시켰다. 미국에서도 다리가 부러진 비슷한 사례가 있어 6개월간 치료했는데 결국은 실패했다고 했다. 말만 고통을 받는다는 판단에 할 수 없이 안락사시켰다.

-당시 보험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다고.
일각에서는 보험금을 받으려고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왔다. 5살이 넘으면 보험을 들어주지도 않는데 말이다. 마사회에서 ‘미스터파크’는 보험 가입 대상도 아니고, 보험이 안 들려있다는 해명 글이 올라오고 나서야 오해가 풀렸다. 그걸 보고 있으니 서운하고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미스터파크’는 곽종수 마주에게 어떤 의미인가.
‘미스터파크’는 내게 많은 기쁨을 준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다. 내가 갈 때마다 나를 알아볼 정도로 영리한 말이었다. 다치기 전에 나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것 같았는데 그 생각만 하면 아쉽다. 요즘 같으면 재활도 받고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 내 사업이 바빠서 신경 못 썼던 게 안타깝다. 지금의 나 같았으면 절대 출전 안 시켰을 거다. 죽은 다음에 녀석을 위해 49재도 지냈고, 태어난 데에 비석도 세워줬다. 2013년에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에 ‘미스터파크’ 동상을 세울 때도 300만 원을 냈다.

-장학 사업에 가장 앞장서는 마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언제부터 장학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나.
사실 1980년대 초부터 봉사활동을 했었다. 당시 라이온스 클럽 활동을 하면서 봉사와 연을 맺었는데 봉사활동을 하면서 장학 사업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지금은 라이온스 클럽 회원 수도 늘고, 지구도 많아졌지만 당시는 아무나 라이온스 클럽 회원이 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내가 최연소로 가입했었고, 열심히 활동해 미국 라이온스 클럽 총장에게 표창도 받았다.

-장학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일화가 있나.
정확한 몇 년도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라이온스 클럽에서 인천에 있는 ‘이작도’라는 섬에 봉사활동을 가게 됐다. 섬에 있는 학교이다 보니 육지보다 물품들이 많이 부족했다. 섬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학교에 풍금 같은 악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당시 풍금이 150만 원 정도 하던 시기였는데 자비를 들여 학교로 보냈다. 풍금을 전해주기 위해 다시 ‘이작도’에 있는 학교를 방문했는데 전교생이 운동장에 줄지어 서서는 감사의 의미로 손뼉 쳐주더라.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까지 나와서 박수 쳐주는 모습을 보니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엔지니어로 산업현장에서만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이 언제 교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연설을 해보겠는가. 며칠 뒤 한 번 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집으로 이작도 학생들이 감사 편지 70~80여 통을 보낸 거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장학 사업을 시작해야겠단 마음을 먹었다.

-곽종수 마주는 어떤 길을 살아왔나.
사실 난 공부를 못했다. 중학교 교육과정을 다 마치긴 했는데 학비를 안 냈다고 학교에서 퇴학으로 처리했더라. 난 현장 엔지니어 출신으로 중2 때부터 영남주물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렇게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다 보니 1970년에는 정부종합청사 짓는 역할도 주어졌고 일조했다. 완공 후에는 정부종합청사 최고 기술자 표창도 받았다.

-당시 일화가 하나 있다던데.
그때 독일 기술자와 함께 일했었는데 독일의 선진 기술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독일 사람이 작업할 때마다 문을 잠그고 기술을 안 가르쳐 주더라. 그래서 내가 천장을 네 군데 뚫어 쳐다보면서 배웠다. 독일 사람이 나랑 싸우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리고 내가 어깨 넘어 본 기술로 작업했다. 당시 설비 담당자가 보더니 내가 최고라고 했다. 그 후에 국가에서 일본 메이덴샤로 기술 연수도 보내주더라.

-국내 최초 자동화 기술자로 돈도 많이 벌었다던데.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자동화 기술자가 없었다. 내가 일본 메이덴샤에 가서 자동화 기술을 배워와 국내 최초의 자동화 기술자로 그때 돈을 많이 벌었다. 국내에도 자동화 기기들이 도입되던 시기였는데 각 기업에서 자동화 기계와 도면만을 들여와서 내 소문을 듣고 날 불렀다. 당시 하루에 2만 원을 받던 시기였는데 저녁에 잠깐 가서 설비해주고 3만 원을 받았다. 그리고 신문사에서도 밤에 윤전기 고장 나면 가서 봐주고 3만 원씩 받았다. 정부종합청사에서도 많이 호출이 왔었는데 정부청사 측에 고장 난 후 집으로 차 보내고 하면 오래 걸린다면서 전화기 한 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다음날 바로 전화를 설치해 주더라. 당시 전화 한 대가 집 한 채 값 정도 할 때다.

-지난 2007년 설립된 부산경남마주장학회의 가장 대표적인 마주이다. 최근 장학회의 행보에 약간의 아쉬움도 느낀다고.
처음 장학회를 설립했을 당시에는 마주들이 자발적으로 3~4천만 원가량을 냈다. 하지만 지금은 장학 기부금이 확 떨어졌다. 마주들이 장학금을 기부하더라도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장학금을 받은 이들로부터 피드백도 없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장학 사업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상대방이 고마움을 표시하는 걸 보는 기쁨이 있었는데, 마주협회를 통한 장학 사업은 그런 게 전혀 없다. 개인적으로 장학 사업을 하다 보면 하물며 ‘공부를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얘기라도 들었는데 부산경남마주장학회에서는 피드백을 받아본 적이 전혀 없다. 마주들의 자발적인 기부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장학금을 출연한 사람의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 그리고 출연한 마주들을 초대해 장학금 기부 행사도 개최하고, 기부의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어떤 장학 사업을 했는지.
매년 관공서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과거 노량진 살 적에는 매년 30명의 학생에게 장학금 10만 원씩을 줬다. 그 당시 10만 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었다. 80년대 말쯤부터는 자식들도 함께 데리고 다니면서 봉사활동도 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지금도 자식들이 기부금 내는 데는 전혀 인색하지 않다. 한번은 후원을 위해 맏딸과 함께 봉사를 간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함께 사는 학생이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갈 데가 없었다. 그랬더니 맏딸이 “아빠, 갈 데 없는데 나랑 같이 있으면 안 돼?”라면서 사정을 하더라. 그렇게 함께 지내다가 내가 나서서 친엄마를 찾아줬다. 수소문 끝에 엄마가 일본에 있다는 걸 알았고, 내가 보증하고 학교 선생님들의 협조를 받아 그 아이를 일본 친엄마에게로 보냈다. 가서 고생했다는 얘기는 나중에 듣긴 했는데 지금도 맏딸과 절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

-마주로서 올해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
과거에는 비싼 말을 여러 마리 사고, 30마리 정도 갖고 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규모를 줄여 잠시 쉬어가려고 한다. 그렇다고 마주의 자격을 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미스터파크’를 생각해서 죽을 때까지 마주로 살아갈 생각이다.

▲곽종수 마주는 마주들의 자발적인 기부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장학금을 출연한 사람의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장학금 기부에 대한 피드백이 있다면 기부의 기쁨과 보람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미스터파크’의 그랑프리 우승 기념패를 들어 올리는 곽종수 마주의 모습.


황인성 기자 gomtiger@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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