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불황탈출을 위한 돌파구-
하루평균 입장인원 14만명, 500여억원에 육박하는 매출액 등, 연일 신기록 행진을 경신하며 불황을 모르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성장한 한국경마가 경마개최에 필요한 기초적인 운영비조차 마련하지 못해서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6.25전쟁 후 국민 모두가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 때, 폐허로 변한 신설동 경마장을 뒤로하고, 뚝섬이라는 오지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면서부터다. 전쟁 전의 10% 수준으로 규모가 위축 된 경마산업이 자유당 말기와 4.19혁명, 그리고 5.16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분열된 국론 집중과 경제난 타개의 시대적 요청으로 설자리가 없어진 것도 그 주요한 원인이다. 1962년에는 하루평균 마권매출액이 12만원 정도에 머물러 61년에 비해 30%나 감소된 사상 최악의 상태였다. 63년에는 경마사업의 손실을 마사회 임원이 공동으로 책임지는 임원공동보증제 등의 자구책 등을 마련한 결과, 62년보다는 호전됐으나 그래도 하루평균매출액은 36만원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여러 가지 고육책이 마련됐는데, 마사회에서는 시설 투자와 경주마 수준의 향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민간투자를 유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게 된 것이다. 마사회가 갖고있는 고유한 경마개최 사업을 완전히 민영화시키는 것과 정부와 민간이 공동출자, 그리고 민간자본에 시설투자를 맡기고 마사회는 경마시행의 권한만 갖는 방법 등이 논의됐다. 만약 요즈음 2000년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는 경마사업을 민영화시킨다는 정부방침이 발표된다면, 혼전경주 못지 않은 불꽃튀는 낙찰경쟁이 예상되겠지만, 그 당시 대기업체에 경마장 인수의사를 타진한 결과 한양대학 재단에서만 유일하게 희망해왔을 뿐, 그 외에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결국엔 마사회와 민간자본이 결합하는 공영형태로 최종 확정된 것이다.
개인마주제의 단절 ‘덕마흥업’시대
현재 과천 서울경마장으로 이전하면서 1993년에 시행 된 개인마주제는 한국경마의 역사에서 보면 결코 낯설지만은 않은 제도다. 1922년 한강상설 경마장에서 처음 시작된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약 12년간의 불황기 끝인 1966년까지, 무려 40년이 넘는 오랜시간 동안 순수한 개인마주제였다. 요즘은 금기시되는 조교사나 기수의 마주등록도 제한이 없었을 만큼 자유로웠다. 그러나 경마산업 전반의 극심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민간자본의 유치가 결정되면서 그 효과로 독점마주제가 도입됐고, 전통적인 개인마주제는 단절되고 만 것이다. 마사회와 민자유치가 결합된 과정은 이렇다. 문제의 공영안은 처음엔 김덕승 마사회장(63. 12. 16∼70. 3. 30)의 사재를 투입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결국은 덕마흥업 주식회사를 발족시키는 것으로 마사회와의 공영형태가 시작됐다. 그 후 1972년 9월 마사회가 덕마흥업의 재산을 인수할 때까지 일명 덕마시대가 이어졌고, 덕마흥업은 경마장 등의 시행시설에만 투자한 것이 아니라 경주마도 소유하는 독점마주의 역할까지 수행했을 만큼 광범위했다. 1966년 초 외국산 개량마를 일본과 호주에서 170여두를 수입함으로서, 뚝섬경마장 개장이래 주종을 이루던 국산 조랑말 경주는 제주경마장의 개장 전까지는 그 자취를 완전히 감추게 됐다. 경주마 이외의 시설투자로는 목조관람대의 증축과 68년 주로내에 골프장을 건설하여 당시 채소밭이던 전근대적인 모습을 일신시켰으며 결승카메라와 발주기 등을 설치했다. 이렇듯 민자투자에 의한 성과는 컸으나 마사회 소유의 시설, 경주마 소유권 등 여러 이해관계 문제로 결국 70년대 초 마사회가 덕마흥업을 인수하게 됨으로서, 마사회와 덕마흥업 사이의 불편했던 밀월관계는 막을 내리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과 ‘덕마흥업’
5.16군사쿠데타 후 경제발전을 집권이념으로 설정한 박정희 정권아래에서 국가재정에 짐이 됐던 경마산업의 민영화가 심도있게 논의되고 있었다. 그런 정황 속에서 만주사관학교 시절 승마훈련에 익숙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뚝섬경마장에 자주 들려서 ‘동산호’라는 황색말에 자주 기승했고, 뚝섬본관 2층의 전용실에서 가끔씩 머물렀다. 그곳에는 덕마흥업의 임원들도 자주 어울렸는데, 그러한 친분관계로 인해 경마사업의 개최권이 한국마사회에서 덕마흥업 쪽으로 완전히 넘어갈 것이다는 풍문도 심심찮게 흘러나왔다고 한다. 덕마흥업 내부의 임직원 중 군출신이 많았고, 당시 경제개발을 위해 효율적인 국가조직 운영에 관심이 많았던 최고집권자의 구상과 맞아떨어져서, 적자산업이던 경마사업에서 정부가 완전히 손을 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무렵 이웃 일본의 경마가 폭발적인 활황 국면에 있었고, 장래를 내다볼 때 경마사업의 전망이 어둡지만은 않은 것이어서, 경마개최권의 마사회 독점과 시설, 경주마의 덕마흥업 투자 형태로 유지된 것이다.
최고의 경마대회 ‘대통령배 경마’
현재 마사회 주관부서의 장(長)인 장관배 경마대회로 치러지는 한국경마가 한때는 대통령배 경마대회로 위상이 높았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1964년 10월 18일에 시행된 제1회 대통령배 쟁탈 경마대회가 그것이다. 당시 채소밭이었던 주로 안과 삐걱거리는 판자소리가 요란한 목조관람대, 그리고 조랑말 경주로 1일 입장인원 800명에 불과했던 상황에서 대통령배 경마대회의 개최는 최고집권자 개인의 관심과 배려가 없이는 불가능한 여건이었다. 그리고 제11∼13대 김덕승 마사회장의 박정희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친분 또한 큰 역할을 했다. 해방 전후에 중국군 장교로 복무했던 김덕승 회장은 그 무렵 일본군소속 한국인 장교를 안내하면서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을 쌓았다고 한다. 5.16군사쿠데타 때 민간협력자의 한사람으로 참가했던 김회장의 충정으로 대통령배 경마대회가 열렸다고 하면 논리의 비약일까? 아무튼 박정희 대통령은 농림부 장관을 대행시켜 대통령배 경마대회를 주관하게 했고,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다. 1966년 5월 2일에 박대통령이 신축목조관람대 2층 귀빈석에서 경마를 관람했는데, 이것이 현직대통령이 경마를 관람한 최초이자 마지막 기록이다. 해방후의 신설동 경마장에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백범 김구선생 등 수많은 명사들이 다녀갔으나, 이승만 박사도 대통령이 된 후에는 1960년 하야시까지 한번도 경마장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을 만큼, 현직대통령이 관람한 기록은 유일한 것이었다.
한국경마 세계화를 위한 첫시도
현재는 과천벌 기수들의 일본, 필리핀 등 국제친선경마대회 우승소식이 심심찮게 들리지만, 1922년 한국경마가 걸음마를 시작한 이후, 1960년대 후반까지는 단 한차례의 국제교류도 없었던 철저하게 고립된 신세였다.
최초로 외국 경마계와 접촉을 가진 것은 한.일관계 정상화직후인 66년의 한.일 친선경마다. 민자투자에 의한 개량마 수입의 결과 일본 경마계와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5명의 일본기수가 입국해서 친선경마를 가진 것이다. 곧이어 68년, 69년에는 미국과 호주를 포함한 6개국의 기수들이 뚝섬경마장에 모여 국제친선경마를 열었다. 이러한 지속적인 외국경마계와의 접촉 결과, ARC(아시아 경마회의)의 정회원으로 가입하는 예비결정을 이끌어 낸 큰 결실을 보게됐다.
【손성호 기자 ssho@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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