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 시인
윤 한 로



나는야
종이컵에 시를 쓰는
종이컵 시인
한 줄짜리 짧은 시인

쓰는 거란 주로
모과, 구두, 파리, 팔번지, 촌충 따위
지각, 조퇴, 염소선생
발가락이닮았다 따위

별루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들
잠깐 도취했단
언제곤 구겨버리면 되거든

나는야
종이컵에 시를 쓰는
시시껄렁, 신변잡기 시인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시인

대작들
다른 분들 쓰시게나


시작 메모
스트레스를 받을 땐 자판기 종이컵 커피를 하루에 열 잔이고 마셨다. 그리곤 커피 찌꺼기가 묻은 종이컵을 들고 머릿속으로 한 줄짜리 시들을 떠올렸다. 마치 종이컵 둘레에다 시를 쓰듯, 그러니 ‘종이컵 시’이다. 옥상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한편 찌그리고 나면 스트레스가 좀 풀렸다. 내용이야 시시껄렁하지만, 쩨쩨하지만, 졸렬하지만, 삶에서 가벼운 신변잡기가 아니면 어디서 위안을 얻으랴. 아무튼 난 신변잡기 체질이다. 따지고 보면 뛰어난 우리 사설시조들도 그런 신변잡기식 종이컵 시가 아닌가. 그러니 여기에다 누가 돌을 던지랴,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