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겐 블공평해 보이겠지만 아래와 같은 인생도 있다.
40대 중반 나이에 정부 모처의 국장직을 수년간 수행해오고 있는 이 남자, 가출이라곤 한 번밖에 하지 않은 고 2 딸이 오늘도 방 안에 틀어박혀 있고 사소한 폭행과 절도가 각 1회에 그친 중 3 아들은 올해 들어 자숙하고 있다. 그리고 팔순 노모는 시골 형님께서 어제도 오늘도 차질 없이 모시고 있다. 남자의 아내로 말하자면 비록 집 안에서의 행실과 골프장이나 문화센터나 고급 식당을 드나들 때의 태도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동창과는 두 시간에 걸쳐 대화의 장을 마련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시어머니에게 전화 한 통 넣는 것엔 극히 인색하다 하더라도, 마사지숍과 닭백숙이 있는 화투판에서 번갈아 오후를 보낸다 하더라도, 어떤 아저씨한테 협박을 당하고 있지만 않다면, 벌벌 떨며 그 아저씨의 계좌로 송금만 하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가정을 수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배삼지 국장이 바로 위의 행운의 사내로, 수단 좋은 아내가 머리와 발로 동시에 뛰어 마련한 33평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데다, 올해도 건강 검진에서 지방간과 고 콜레스테롤로 의사와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을 뿐 암이라곤 한군데도 발견되지 않았다. 10억을 내놓든가 아내와 지금 당장 이혼하라고 생떼를 쓰는 살벌한 정부도 없었다. 그리고 차관께서 ‘배 국장은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 이런 덕담도 얼마 전에 주셨다. 국장의 인생이 괴로워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인적 없는 밤거리에서 사내의 가슴에 파고드는 이 서늘한 기운은 무엇인가? 왜 배삼지 국장은 허한 가슴을 부여잡고 마돈걸에게 전화했다가 이윽고 동네 어귀의 수수께끼 같은 카페로 들어가 살찐 뱀 같은 마담과 마주하게 되었는가? 어째서 진짜 인생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 같은가? 이 대목에서 독자 제위께서는 이 작자가 호강에 겨워 미친 소리를 지껄인다고 보리라. 작가가 봐도 약간 미친 소리 같기는 하다.
아무튼 마담이 대형 쟁반에다 양주 중자와 얼음통, 우유 대자에 깡통 우렁차 두 개, 물 컵 두 개와 양주 잔 두 개를 받쳐와 탁자 위에 차례차례 내려놓고는, 어루만지는 건지 쓸어내리는 건지 손으로 스커트를 쓸면서 조신하게 앉자 배삼지 국장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여자는 장안에서 드문 편인데 이 마담은 어떻게 된 게 그 드문 편에 속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팽창하고 있는 듯한 젖가슴하며, 웃을 때마다 파이는 볼우물 하며, 은은히 퍼져오는 향기 하며, 스커트 사이로 언뜻 비치는 허여멀건 허벅지 하며, 아까 봐 버린 풍만한 엉덩이 하며, 모든 것이 사람을 어떤 세계로 잘 인도하고 있었다. 배삼지 국장은 마담이 따라주는 위스키 한 잔을 쭉 들이켰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